일전에 중학교때 미술책에서 흰소그림을 봤던 기억이..

 

어느분은 충격까지 받으셨다는데

 

그분이 이중섭이라는 천재화가인걸 이제야 알았네요..

 

감동받고 배우또한 대단하십니다.

 

오랜만에 평온하게 봤습니다.

 

 

이중섭 그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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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생애 초기

그림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셔서 출생지인 평원을 떠나 외가였던 평양으로 가족 모두 거처를 옮겨 평안남도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외조부께서는 평양 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사업이 아주 번창했다고 한다. 사업 종류가 일제시대에 거리낄 일이 없는 종류라 어릴 때 부터 어려움은 전혀 모르고 편안한 유년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 시 오산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민족 정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되는데 오산고 시절 민족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의 주제를 황소로 잡고 황소를 소묘하는 작품으로 참가하게 된다. 당시 황소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황소라고 할 정도로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동물이라 일본인들이 일부러 소에 관련된 표현 자체를 못하게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보란듯이 비웃으며 작품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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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이라 전시때 비교적 그림 크기를 크게 그려 내는 기조를 알면서도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를 그린 그림을 본 일본의 한 기자는 이중섭의 천재성을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는 말이 이어진다. 특히 소 그림의 낙관에 중섭이 아닌 둥섭이라고 씌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변절한 문학가가 '머리를 중처럼 밀고 전쟁에 참가하는 아름다운 청년이 되자' 라는 논조의 사설을 보고 중섭의 본인 이름에 발음이 같은 중자도 부르기 싫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분노하여 낙관의 이름까지 바꿔서 써낸 일화가 있다.

일본 유학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에 입학했다가 동경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하였다.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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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에 돌아왔다. 원산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 본명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과 결혼했다

한국 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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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때 월남해서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다니면서 살았다. 통영에서 지낼 때 이중섭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힘든 일생 중 그나마 가장 편안하고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이중섭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이후 그들의 만남은 이중섭이 부두 노동으로 번 돈으로 일본의 처갓집을 방문하여 한 차례 더 있었을 뿐이다.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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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전시회에 작품을 마흔가지도 넘게 전시를 하고 20점이나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지만, 사기로 한 사람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에 돈으로 주기로 한 작품료를 먹을 것으로 대신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고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자 결국 손에 쥔 돈은 얼마 안되는 수고비정도 였다고 한다. 중섭은 전시회때 도와준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술이나 대접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가장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그로 인해 중섭은 거식증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조현병 증세를 보이게 된다.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시체와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기념

현재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1951년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을 개조해 이중섭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이중섭 거리를 조성하였다. 매년 9월에는 이 거리에서 이중섭 예술제를 한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서훈

위작 논란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한국 미술시장계가 냉각되기도 했다.

 

이중섭 다큐드라마 2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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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KBS 1TV는 17~18일 밤 10시30분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을 조명한 다큐 드라마 2부작

KBS제주방송총국에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이 프로는 이중섭의 오랜 벗인 김인호, 백영수 화백의 증언, 일본 도쿄에 살고 있는 올해 96세인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 여사의 기억을 모아 만들어진 다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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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서귀포의 환상>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중섭이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의 인연과 사랑, 결혼과 제주 피난생활까지.. ‘화가 이중섭의 제주시대’가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 속에서 펼쳐진다.

 1부-서귀포의 환상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중섭은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 제주로 피난왔다. 서귀포 앞바다의 섬들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한 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시작된 제주에서의 피난 생활, 전쟁으로 인한 고단하고 궁핍한 상황 속에서도 중섭 가족은 생애 가장 행복한 나날들을 제주에서 보냈다.

중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되게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다. 제주에서의 행복한 생활과 고요한 감정은 제주 시절 작품에 그대로 투영됐다. 제주 시대에 탄생한 중섭의 작품들은 대상에 대한 표현과 색채, 구도에서도 일본 유학시절과 고향 원산에서의 화풍과는 또 다른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

또한 중섭은 서귀포 주민들의 삶과 생활 속에 깊이 동화돼 들어갔다. 원산 시절 어머니의 부탁에도 초상화를 그려주지 않았던 그가 서귀포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려줬다. 거기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는데..초상화에 얽힌 슬픈 사연을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주에서의 피난 생활 11개월, 극도의 불안과 공포, 궁핍의 시대였지만 화가 이중섭이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순간, 서귀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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