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가 하나 떳습니다. 바로 김병지선수가 은퇴한다는 기사인데요 ..

 

얼마 차이 않나는 김병지 선수...

 

병지형 수고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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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 레전드 골키퍼 다들 공감하실겁니다.

 

 

출처 : http://sportalkorea.mt.co.kr/news/view.php?gisa_uniq=2016072009213612&section_code=10&cp=se&gomb=1

 

 

 

한국축구의 전설 김병지가 오는 9월 18일(일) 오후 2시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리는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6 울산과 포항의 153번째 ‘동해안더비’에서 은퇴식을 가진다.

이번 은퇴식은 김병지가 현역시절 활약했던 두 팀의 라이벌 경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김병지는 1992년 울산에서 데뷔해 2000년까지 활약했으며, 2001년 포항으로 이적해 2005년까지 몸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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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병지는 울산과 포항 양 팀의 경쟁의식을 고조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1998년. 플레이오프 당시 포항이 1차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울산은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결승에 진출을 할 수 있었다.

절실히 골이 필요했던 울산은 총공격에 나섰고 종료직전 마지막 세트피스 상황에서 공격에 가담한 김병지가 헤딩으로 득점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골은 K리그 역사상 최초의 골키퍼 득점으로 기록됐다.

울산은 김병지의 골을 원동력 삼아 결승진출에 성공했으며, 이 경기는 본격적으로 라이벌전 열기에 불을 붙인 사건이 되었다.

한편, 울산은 김병지가 현역으로 뛴 소속팀(울산->포항->서울->경남->전남) 중 가장 오래 몸담은 팀이기도 하다. 출전기록도 울산에서 가장 많이 했다. 24시즌동안 출전한 706경기 중 223경기를 울산에서 뛰었다.

울산은 ‘한국축구 레전드’이자 ‘울산의 상징적인 선수’인 김병지에 걸맞은 은퇴식을 준비할 계획이다. 세부계획은 추후 공개한다

 

- 히스토리

 

김병지 (金秉址, 1970년 4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별명으로 꽁지머리였고 영원한 라이벌 이운재와 함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설적인 명골키퍼로 평가 받고 있다. 동물적인 감각과 독보적인 빠른 민첩성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였다. 수비적이고 안정적인 이운재와는 다르게 공격적인면이 많은 골키퍼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출생으로 밀양초등학교, 밀양중학교,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국가대표팀 데뷔 초기에는 염색한 긴 뒷머리를 묶어서 '꽁지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100m를 11초대에 뛰는 빠른 스피드 때문에 '번개'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2015 시즌 종료 현재 총 706경기(리그컵 111 경기 포함)에 출전하여 K리그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수경력 :

김병지는 밀양초등학교 시절까지 육상선수로 활동하였으며,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밀양중 졸업 후, 마산공업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가정 형편상 축구부 회비를 낼 여력이 없었다고. 결국 김병지는 국비 지원을 조건으로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로 전학을 결정했고,학교 축구부 골키퍼로 활약했지만, 받아주는 팀이 없자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창원 기계공단의 금성산전에서 용접공으로 2년을 생활하였다. 1990 상무 입단테스트에 합격해 2년 군생활 뒤, 1992년 울산 현대에서 데뷔하여, 1996년 K-리그 우승, 1998년 K-리그 준우승 등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98년 10월 24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1로 맞선 후반 추가시간 프리킥 찬스에서 헤딩슛을 성공시키면서 골키퍼 최초의 필드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는데, 당시 실점의 책임에 대해서 포항 스틸러스 포백이 대인마크에 소홀한 탓인지, 골키퍼 김이섭의 방심이 원인이었는가에 대해서 이견이 많았다고 한다. 1998년 FIFA 월드컵 이후, 월드컵에서 김병지의 활약을 지켜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블랙번 로버스 FC, 에버턴 FC, 사우샘프턴 FC 등 여러 팀들이 김병지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김병지는 당시 소속팀이었던 울산 현대의 반대로 K-리그에 남게 되었다.

2001년 당시 국내 선수 중에서는 최고 이적료로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여,[1] 2004년 K-리그 준우승 등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2004년 12월 12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챔피언 결정전 2차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3:4로 패하였는데, 당시 김병지는 5번째 키커로 나섰지만 그의 슈팅이 '영원한 라이벌'인 이운재에게 막히며 우승을 내주기도 하였다.[2] 2005년 5월 9일 FC 서울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서 무실점 방어를 이루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17경기 무실점 방어로 개인 통산 최다 무실점 타이를 기록하였고,[3] 5월 18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서 무실점 방어를 이루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18경기 무실점 방어로 개인 통산 최다 무실점 신기록을 세웠으며,[4] 2008시즌을 기준으로,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개인 통산 최다 무실점 기록을 166경기로 갱신하고 있다.

2006년 FC 서울로 이적하여[5] 2006년 하우젠 컵 우승 등에 공헌하였다. 2006년 5월 10일 경남 FC와의 K-리그 13라운드 경기에서 K-리그 사상 2번째로 프로 통산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6] 2006년 5월 14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401경기 출장으로 개인 통산 최다 출장 타이를 기록하였고,[7] 5월 17일 경남 FC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402경기 출장으로 개인 통산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웠으며,[8] 2008시즌을 기준으로,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개인 통산 최다 출장 기록을 471경기로 갱신하고 있다.2006년 시점으로 k-리그 한 시즌 최다 무실점 기록으로 21경기를 기록했다. 2007년 10월 7일 성남 일화 천마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하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51경기 무교체 출장으로 개인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 타이를 기록하였고,[9] 10월 10일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홈 경기에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하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통산 152경기 무교체 출장으로 개인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 신기록을 세웠으며,[10] 10월 14일 대구 FC와의 K-리그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하며 K-리그와 K-리그 컵대회 합산 개인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 기록을 153경기 늘렸지만, 2008년 1월 30일 칠레와의 A매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입어 시즌 초반 아웃되면서 기록이 마감되었다.[11]

2009년 자신의 고향인 경상남도를 연고지로 하는 팀인 경남 FC에 플레잉코치로 이적하여 활약하였다.[12] 경남 FC로 이적한 뒤 자신의 500경기 출장을 바라는 뜻으로 등번호 500번을 달고 뛰려 했으나[13]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남은 29경기를 채우겠다는 의미로 29번을 달게 되었으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500번째 출장을 기록하여 등번호 500번을 달고 뛰었다.[14]

1995년부터 2006년까지 11회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올스타전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고,[15] 2007년에도 12회 연속으로 출전하여 올스타전 최다 출전 기록을 경신하였다.[16]

그 후, 2013 시즌을 앞두고 경남을 떠나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였고, 2015 시즌 중에는 프로통산 700 경기 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2015 시즌이 끝나고, 전남과의 계약이 만료된 그는 전남과 결별하여 새 소속팀을 찾고 있으나, 선수추가등록기간(2016년 3월 28일까지 선수추가등록기간)이 마감되어 결국 소속팀을 찾지 못한채 무적신세로 지내게 되었다.

2016년 7월 19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은퇴를 선언하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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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타일 :

1995년 6월 5일, 코리아컵에서 코스타리카와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국가대표 간판 골키퍼로 1998년 FIFA 월드컵2002년 FIFA 월드컵 등에 출전하였다.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예선 3경기 동안 9점을 실점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의 수비가 불안정해 무려 3경기 동안 56개의 유효슛팅을 허용했고, 그 중 9개만 김병지가 실점함으로써 김병지는 그 당시 월드컵에서 야신상을 받은 프랑스파비앵 바르테즈에 이어 골키퍼 종합 방어율 2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고, 당시 야신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고 한다.

2001년 1월 27일 칼스버그컵파라과이전에서 무리하게 공을 몰고 나가다 상대에 빼앗겨 실점위기를 초래하여 교체당한 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밖에 나서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했다는 오해를 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거스 히딩크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병지는 이후 성실한 자세를 보여[18] 다시 대표팀으로 발탁되었고,[19] 월드컵 직전까지 이운재와 실력이 비슷하여 실제로 월드컵 직전까지는 번갈아 기용하여 서로 경쟁시켰다.[20] 다만 월드컵 첫경기인 폴란드전에서 이운재의 컨디션이 미세히 앞서서 그를 기용하였고, 이후 상태가 좋아 계속 기용하게 된 것 뿐이라고 한다.

그 뒤, 이운재에게 주전 골키퍼 자리를 넘겨주어 2002년 11월 20일 브라질전 이후 선발되지 못했다.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과도하게 불어난 체중으로 인해서 소속팀이나 국가대표팀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던 이운재 대신 김병지를 발탁하자는 축구팬들의 여론이 있었지만 결국 선발되지 못했고, 이에 축구팬들은 뜨거운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21] 2007년 12월 허정무 감독 취임 후 이운재의 음주 파동에 의한 대표 정지로 인해 다시 기회를 받게 되었고, 2008년 1월 30일 칠레와의 A매치로 약 6년 만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해[22] 선발 출장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전반 교체 되었고 중도 탈락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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